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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축제

필리핀 원주민들의 조상 제사, 판타르라하(Panagtarrahah)의 신성한 춤

1. 판타르라하(Panagtarrahah)의 기원과 필리핀 원주민의 조상 숭배 전통 

판타르라하(Panagtarrahah)는 필리핀 원주민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거행하는 신성한 제사 의식으로, 조상과의 영적 교감을 통해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다. 필리핀은 7,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이며, 각 지역의 원주민 집단은 저마다 독특한 신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판타르라하는 특히 루손(Luzon) 섬의 이푸가오(Ifugao), 코르딜레라(Cordillera) 지역 원주민과 민다나오(Mindanao)의 마노보(Manobo) 부족을 중심으로 전승되었으며, 필리핀 원주민들의 조상 숭배 신앙과 애니미즘(animism) 사상이 반영된 의례로 발전했다.

필리핀 원주민들은 조상을 단순한 과거의 존재로 보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영혼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조상이 후손들의 삶을 지켜보며 축복을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조상의 영혼을 기리는 의식은 단순한 제사를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행위로 간주된다. 판타르라하는 바로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조상의 영혼과 직접 소통하는 신성한 의례로 자리 잡았다.

 

2. 판타르라하 의식의 신성한 춤과 영적 교감 

판타르라하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신성한 춤(Ritual Dance)’이다. 이 춤은 조상의 영혼과 후손들이 직접 소통하는 신비로운 과정으로 여겨지며, 필리핀 원주민 사회에서 ‘바바일란(Babaylan)’ 또는 ‘카탈로난(Katalonan)’이라 불리는 샤먼이 주관한다. 바바일란은 여성 사제 또는 주술사로서, 영적인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판타르라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의식이 시작되면 바바일란은 특정한 노래와 주문을 외우며, 조상의 영혼을 초대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때 전통적인 악기인 ‘쿨린탕(Kulintang, 황동 타악기)’과 ‘아그옹(Agung, 큰 징)’이 연주되며, 이 음악은 의식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악이 울려 퍼지면 참가자들은 일정한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이 춤은 ‘파구얍(Pagyap)’이라 불리며,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조상의 영혼이 인간 세계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행위로 해석된다.

특히 판타르라하에서의 춤은 무작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조상의 영혼이 강림했을 때 특정한 몸짓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바바일란이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 조상의 영혼과 하나가 되면, 그 순간부터 춤의 형태가 바뀌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조상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이를 통해 후손들은 조상의 축복을 받거나, 앞으로의 삶에서 조심해야 할 점을 깨닫게 된다.

 

필리핀 원주민들의 조상 제사, 판타르라하(Panagtarrahah)의 신성한 춤

3.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과 공동체 의례 

판타르라하에서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필리핀 원주민들은 조상의 영혼이 인간의 세계에 내려와 일정 기간 머무른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이 머무는 동안 먹을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의식에서는 닭, 돼지, 쌀, 코코넛, 바나나 등의 희생 제물이 준비된다.

특히 ‘타파이(Tapai)’라는 발효 쌀 음료가 중요한 제물로 사용되는데, 이는 조상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신성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타파이는 발효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어, 영혼 세계와의 연결을 강화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바바일란은 타파이를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신성한 공간에 뿌리며, 이는 영혼이 만족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판타르라하는 단순한 조상 제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의례로서, 이를 통해 사회적 유대감이 더욱 강화된다. 가족과 친족들이 함께 모여 조상의 영혼에게 예를 갖추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원주민 사회에서는 이러한 의식을 통해 공동체의 연대를 확인하며, 조상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서도 실천하려는 노력이 지속된다.

 

4. 현대 사회에서의 판타르라하와 문화 보존 노력 

현대에 들어 필리핀 원주민들의 전통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판타르라하 역시 일부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서구화와 도시화로 인해 젊은 세대가 전통 신앙을 따르지 않는 경향이 증가하면서, 판타르라하와 같은 의식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필리핀 정부와 문화 단체들은 원주민 문화 보존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필리핀 국립문화예술위원회(NCCA, National Commission for Culture and the Arts)는 판타르라하를 포함한 원주민 의식을 국가문화유산(National Cultural Heritage)으로 지정하고, 이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승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일부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판타르라하를 관광 문화 행사로 재구성하여 널리 알리고 있으며, 필리핀 대학에서는 전통 춤과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매년 열리는 ‘카다얀 축제(Kadayawan Festival)’에서는 판타르라하의 신성한 춤이 공연으로 재현되며, 필리핀 전역에서 온 관람객들에게 소개된다. 이를 통해 판타르라하가 단순한 원주민 의식을 넘어, 필리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결국, 판타르라하는 필리핀 원주민들의 영적 전통과 공동체 정신이 반영된 신성한 의식으로,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전통이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 또한 지속되고 있으며, 판타르라하는 필리핀 원주민 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