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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축제

말레이시아 사라진 부족들의 전통 축제, 하리 가와이(Hari Gawai)의 벼 신 숭배

1. 하리 가와이(Hari Gawai)의 기원과 사라진 부족들의 농경 신앙 

하리 가와이(Hari Gawai)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 사라와크(Sarawak)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이 벼 수확을 기념하며 거행하는 전통 축제다. 이 축제는 매년 6월 1일과 2일에 걸쳐 진행되며, 원래는 다약(Dayak)족을 비롯한 여러 사라와크 원주민 부족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경 의례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단순한 수확 축제를 넘어, 사라와크 원주민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하리 가와이는 벼 신을 숭배하는 종교적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라와크 지역의 원주민들은 벼를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특히 이반(Iban)족과 비다유(Bidayuh)족은 ‘숨부(Sumbu)’라 불리는 벼 신을 숭배했으며, 벼의 풍작 여부가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수확철이 끝나면 벼 신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음 농사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 전통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하리 가와이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하리 가와이는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말레이시아 정부는 원주민들의 전통 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이슬람 또는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사라와크의 일부 부족들은 전통 신앙을 포기하고 하리 가와이 같은 축제도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63년 사라와크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한 이후, 원주민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하리 가와이를 부활시키고, 이를 공식적인 공휴일로 지정하는 데 성공했다.

 

2. 벼 신 숭배와 하리 가와이의 신성한 의식 

하리 가와이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는 벼 신을 기리는 ‘미란(Miring)’ 제사다. 이 의식은 주로 마을의 최고 연장자나 샤먼(무당)에 의해 거행되며, 벼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미란 의식에서는 돼지, 닭, 쌀, 술(투악, Tuak) 등을 제물로 바치며, 샤먼은 신령과 조상의 영혼을 불러와 공동체를 축복하도록 기원한다.

특히, 의식에서는 ‘나가바이(Ngabang)’라는 희생 제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가바이는 부족 전사들이 벼 신과 조상의 영혼에게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는 의식으로, 전통적으로 닭이나 돼지를 제물로 바치며 수행된다. 이는 단순한 희생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번영과 안전을 기원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샤먼은 제물을 바친 후 피를 땅에 뿌려 신에게 바치며, 이를 통해 농사의 성공과 공동체의 안정을 기원한다.

하리 가와이에서는 신성한 의식을 통해 영적 정화도 이루어진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 참가자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강가에서 ‘아이르 베르사(Air Bersih)’라는 정화 의식을 거행한다. 이 의식은 물이 인간의 죄와 부정한 기운을 씻어낸다고 믿는 원주민들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사라와크 원주민들은 축제 기간 동안 악령을 쫓기 위해 집 안과 마을 입구에 신성한 잎(일반적으로 바나나 잎이나 야자 잎)을 걸어두는 풍습이 있다.

 

말레이시아 사라진 부족들의 전통 축제, 하리 가와이(Hari Gawai)의 벼 신 숭배

3. 하리 가와이의 전통 춤과 집단 축제 문화 

하리 가와이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전통 춤과 음악이다. 사라와크 원주민들은 축제 기간 동안 공동체 전체가 모여 전통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조상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춤은 ‘응자트(Ngajat)’이며, 이는 이반족 전사들이 전투를 앞두고 신에게 용맹을 기원하며 추던 전통 춤이다.

응자트 춤은 춤추는 사람이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몸을 낮추며 사뿐사뿐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이 특징이다. 이 춤은 전사의 용맹을 기리는 의미뿐만 아니라, 벼 신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종교적 의식이기도 하다. 춤을 출 때는 전통 악기인 ‘엔구리(Nguri, 현악기)’와 ‘구랑탕(Gurang Tangan, 대나무 타악기)’이 연주되며, 이는 축제의 분위기를 더욱 신성하게 만든다.

또한, 하리 가와이는 ‘롱하우스(Longhouse, 공동 거주지)’에서 진행되는 집단 축제다. 사라와크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롱하우스라는 대형 목조 가옥에서 여러 가구가 함께 생활하는데, 하리 가와이 기간 동안 모든 마을 사람들이 롱하우스에 모여 함께 축제를 즐긴다. 이곳에서는 전통 음식(떡, 쌀요리, 코코넛 음료)과 술이 제공되며,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

 

4. 현대 사회에서의 하리 가와이와 전통 보존 노력 

현대에 들어 하리 가와이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국가적 축제로 자리 잡았으며, 매년 전국적인 행사로 개최되고 있다. 과거에는 사라와크 지역 원주민들 사이에서만 전승되던 축제였으나, 현재는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하리 가와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전통 의식은 점차 변형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샤먼이 중심이 되어 신성한 벼 제사를 주관했지만, 현대의 하리 가와이는 공연과 퍼레이드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젊은 세대가 점차 도시로 이동하면서 롱하우스 문화가 쇠퇴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하리 가와이의 본래 의미가 희석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에 대응하여 사라와크 문화부와 원주민 단체들은 전통 보존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라와크 박물관과 지역 문화 센터에서는 하리 가와이의 전통 춤과 의식을 복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원주민 공동체들은 축제의 원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샤먼 의식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리 가와이는 사라와크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현대적 변화 속에서도 그 본래 의미를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벼 신 숭배에서 시작된 이 축제는 단순한 농경 의례를 넘어, 공동체의 연대와 전통을 지키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