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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축제

인도네시아 발리의 귀신 쫓기 축제, 녜피(Nyepi)와 정화 의식

1. 녜피(Nyepi)의 기원과 발리 힌두교의 시간 개념 

녜피(Nyepi)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행해지는 힌두교의 새해 축제로, ‘침묵의 날(Day of Silence)’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인도네시아 힌두교도들이 사용하는 ‘사카력(Śaka Calendar)’의 새해 첫날에 해당하며, 매년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신월이 뜨는 날에 거행된다. 녜피의 핵심 개념은 세계의 정화와 영적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발리 전역에서 하루 동안 모든 활동을 멈추고 철저한 침묵과 명상을 실천한다.

녜피의 기원은 인도에서 유래한 힌두교의 우주론과 관련이 깊다. 힌두교에서는 우주는 일정한 주기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이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의 세계도 주기적으로 정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발리 힌두교도들은 인간의 행위가 축적된 ‘카르마(karma)’가 세상의 균형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정화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녜피를 통해 모든 활동을 멈추고 영적 정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개념은 발리 힌두교의 핵심 철학인 ‘트리 히타 카라나(Tri Hita Karana, 세 가지 조화)’—자연과 인간, 신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원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2. 오고오고(Ogoh-Ogoh) 퍼레이드와 악령 쫓기 의식 

녜피 전날 밤, 발리에서는 화려한 ‘오고오고(Ogoh-Ogoh)’ 퍼레이드가 열린다. 오고오고는 대형 악령 조각상으로, 발리 신화에 등장하는 ‘부트라칼라(Bhutakala)’라는 악령을 형상화한 것이다. 부트라칼라는 인간 세계에 남아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상징하며, 녜피 전날 이 악령을 불태우는 의식을 통해 모든 나쁜 기운과 악한 카르마를 소멸시킨다.

오고오고 퍼레이드는 발리의 각 마을에서 준비하며, 수개월 동안 장인들이 대형 조각상을 제작한다. 오고오고는 전통적으로 대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지며, 용, 마귀, 괴수 등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퍼레이드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북과 전통 악기를 두드리며 오고오고를 들고 마을을 돌며 소리를 지른다. 이는 악령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몰아내기 위한 행위로, 발리 힌두교에서는 악령이 소음과 혼란을 싫어한다고 믿는다.

퍼레이드가 끝나면 오고오고 조각상은 마을 광장이나 사원 앞에서 불태워진다. 이 과정은 인간이 지닌 악한 에너지를 정화하는 의식을 상징하며, 불의 정화 능력을 통해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소멸시킨다고 여겨진다. 불태운 후 남은 재는 바다나 강에 흘려보내는데, 이는 정화된 영혼이 자연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힌두교의 윤회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귀신 쫓기 축제, 녜피(Nyepi)와 정화 의식

3. 침묵과 명상의 날, 녜피 본행사 

녜피 당일에는 발리 전역이 철저한 침묵 속에 들어간다. 이 날에는 모든 외출이 금지되며, 전기 사용, 요리, 심지어 말하는 것조차 삼가야 한다. 심지어 발리 공항도 하루 동안 폐쇄되며, 관광객들 역시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녜피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영적으로 정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발리 사람들은 명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힌두교에서 녜피의 침묵은 ‘우파와사(Upavāsa, उपवास)’라는 수행 개념과 연결된다. 우파와사는 힌두교에서 단식과 금욕을 통해 영적 정화를 이루는 방법 중 하나로, 신과 가까워지기 위한 중요한 수행이다. 발리 힌두교도들은 녜피 동안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말과 행동을 줄이고, 음식 섭취를 최소화하며,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녜피 동안에는 ‘차투르 브라타 페냼파한(Catur Brata Penyepian)’이라는 네 가지 계율이 지켜진다.

  1. 아마티 겁(Amaati Geni): 불을 피우거나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2. 아마티 카르야(Amaati Karya): 모든 노동과 활동을 멈춘다.
  3. 아마티 렐랑안(Amaati Lelungan): 여행과 이동을 금지한다.
  4. 아마티 레낭(Amaati Lelangon): 오락과 즐거움을 피하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한다.

이러한 규칙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실천해야 하며, 이를 통해 발리는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들어간 듯한 모습을 보인다.

 

4. 녜피 다음 날, 은사(Ngembak Geni)와 화해의 의미 

녜피가 끝난 다음 날을 ‘은사(Ngembak Geni)’라고 부르며, 이 날은 가족과 친구들이 다시 모여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는 시간이다. 힌두 철학에서 인간의 삶은 ‘카르마’에 의해 결정되며, 서로에게 쌓인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을 실천하는 날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과거의 갈등을 풀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은사 동안 발리 사람들은 가족을 방문하고, 전통 음식인 ‘로락(Lolak)’을 나누어 먹으며 공동체 정신을 강화한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메다카단(Medakadan)’이라는 물 정화 의식이 열리는데, 이는 바닷가나 강에서 몸을 씻으며 녜피 기간 동안 정화된 에너지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이다. 이를 통해 발리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연과 공동체 전체가 새로운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에 들어 녜피는 발리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전역, 심지어 해외에서도 관심을 받으며, 발리 힌두교의 독특한 전통을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발리 정부는 녜피의 본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관광객들에게도 이 전통을 존중하도록 권장하며, 각종 문화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녜피의 가치를 전수하고 있다.

결국, 녜피는 단순한 연례 행사가 아니라, 발리 힌두교의 철학과 영적 정화의 개념이 살아 있는 살아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침묵과 명상을 통해 내면을 성찰하고, 악령을 몰아내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녜피는 인간과 자연, 신의 조화를 이루려는 발리 힌두교도들의 신념이 반영된 신성한 축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