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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축제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을 기리는 쿠마리 축제, 쿠마리 자트라(Kumari Jatra)

1. 신성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 쿠마리 여신

네팔에서 가장 신비로운 전통 중 하나로 손꼽히는 "쿠마리 자트라(Kumari Jatra)"는 살아있는 여신인 ‘쿠마리(Kumari)’를 기리는 축제이다. 쿠마리는 단순한 신격화된 인물이 아니라, 네팔 카트만두 계곡의 네와르족(Newar) 전통에서 신성한 힘을 가진 인간 여신으로 여겨진다. 이 독특한 전통은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 네팔 왕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쿠마리는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어린 소녀 중에서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선택되며, 신성한 존재로서 숭배된다. 전통적으로 힌두교의 '두르가(Durga)' 여신과 탄트라 불교의 '바즈라데비(Vajradevi)' 신격을 결합한 존재로 여겨지며, 그녀가 세속적인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성한 힘을 지닌다고 믿어진다.

쿠마리로 선택된 소녀는 성인이 되거나 월경을 시작하는 순간까지 살아있는 여신으로 존경받으며, 그녀가 머무르는 '쿠마리 바하(Kumari Bahal, 쿠마리 궁전)'에서 신격화된 삶을 살아간다. 이렇듯 쿠마리는 단순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네팔 왕권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을 기리는 쿠마리 축제, 쿠마리 자트라(Kumari Jatra)

2. 왕권과 함께한 쿠마리 신앙, 그리고 쿠마리 자트라의 기원

쿠마리 자트라는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네팔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국가적 행사이다. 이 축제는 12세기경 말라 왕조(Malla Dynasty) 시절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왕들은 쿠마리를 숭배하는 것이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성한 의식이라고 믿었다.

쿠마리 신앙과 왕권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은, 18세기 네팔을 통일한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 왕이 쿠마리의 축복을 받아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후, 네팔 왕실은 쿠마리를 왕국의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쿠마리 자트라는 공식적인 왕실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쿠마리 자트라 축제는 카트만두의 바산타푸르 광장(Basantapur Durbar Square)에서 가장 화려하게 펼쳐지며, 이곳에서 쿠마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왕과 고위 관리들에게 신성한 축복을 내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과거에는 왕이 쿠마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축복을 받았으며, 이는 왕의 신성한 권위를 인정받는 중요한 정치적 의례였다.

현재 네팔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마리 자트라는 여전히 네팔의 중요한 전통 축제로 남아 있으며, 국가적 행사로서의 의미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3. 살아있는 여신의 행렬, 쿠마리 자트라의 장엄한 퍼레이드

쿠마리 자트라는 매년 9월경 네팔의 대표적인 힌두교 축제인 "인드라 자트라(Indra Jatra)"와 함께 진행되며, 쿠마리가 직접 거대한 황금 가마를 타고 카트만두를 행진하는 장관이 연출된다. 이 퍼레이드는 카트만두 계곡의 주요 사원과 왕궁을 지나며, 쿠마리는 군중에게 축복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쿠마리는 화려한 붉은색과 황금빛 의상을 착용하며, 이마에는 제3의 눈을 상징하는 '아그니 차크라(Agni Chakra)'가 그려진다. 그녀가 타는 가마는 수십 명의 신도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행진하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를 보기 위해 거리에 몰려든다.

쿠마리의 퍼레이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가 인간 세계를 직접 방문하여 축복을 내리는 의식적인 의미를 지닌다.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쿠마리의 눈빛을 받으면 행운이 깃든다고 믿으며, 쿠마리가 미소를 보이면 나라에 번영이 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퍼레이드에는 힌두 신들의 가마 행렬, 전통 북 연주, 전사들의 검무 등 다양한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되며, 네팔 전통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4. 현대 사회에서의 쿠마리 신앙과 논란

쿠마리 신앙은 네팔의 오랜 전통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 인권과 아동권 보호 차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쿠마리로 선발된 소녀들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살아야 한다. 과거에는 쿠마리가 궁전 밖을 나서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교육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전통이 아동의 기본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쿠마리도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개선되었으며,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왕정이 폐지되고 네팔이 공화국으로 전환되면서,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던 쿠마리 신앙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이제 쿠마리는 단순한 종교적 존재가 아니라, 네팔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아, 관광 산업과 연결되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마리 자트라는 여전히 네팔인들에게 중요한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현대적인 변화 속에서도 전통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