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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축제

일본의 사라진 귀족 축제, 나가시비나(흘려보내기 인형제)의 변천사

1. 나가시비나의 기원 – 일본 귀족 사회와 정화 의식 

나가시비나(流し雛)는 일본에서 행해지던 정화(浄化) 의식의 하나로, 악운과 액운을 인형에 담아 강물이나 바다로 떠내려 보내는 풍습이다. 이 풍습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년)**에 귀족 사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일본에 널리 퍼져 있던 음양도(陰陽道)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은 질병, 천재지변, 액운이 신의 저주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다양한 부적과 정화 의식을 사용했다. 나가시비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행사로, 귀족들은 종이, 짚,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雛, 히나)에 자신의 액운을 옮기고 이를 강에 흘려보내면서 불운이 씻겨 나가기를 기원했다.

이러한 풍습은 특히 3월 3일에 행해졌으며, 이는 후에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명절인 '히나마쓰리(雛祭り, 여자아이의 날)'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의 나가시비나는 현재의 히나마쓰리와는 달리, 신분이 높은 귀족들만이 행할 수 있었던 정화 의식이었으며, 화려한 궁중 행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풍습은 점차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의 사라진 귀족 축제, 나가시비나(흘려보내기 인형제)의 변천사

 

2. 나가시비나의 대중화 – 무로마치 시대 이후 일반인의 행사로 변화

 

헤이안 시대까지만 해도 나가시비나는 왕족과 귀족 중심의 행사였으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시대는 일본 사회의 변동이 컸던 시기로, 귀족 중심이던 문화가 점차 무사(武士) 계급과 서민들에게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귀족들이 행하던 나가시비나 의식도 상류층에서 점차 서민들에게까지 전파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자체적인 나가시비나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특히, 나가시비나는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년)에 이르러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단순한 정화 의식을 넘어,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강해졌으며, 화려한 히나 인형을 장식하는 문화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가시비나의 원래 의미였던 '정화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히나마쓰리'라는 새로운 형태의 명절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에 인형을 흘려보내는 나가시비나 의식을 유지했지만, 점차 그 규모는 축소되었다.

 

3. 나가시비나의 쇠퇴 – 환경 문제와 사회 변화로 인한 소멸 

에도 시대까지 성행하던 나가시비나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년)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서구식 근대화와 종교적 의식의 감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존의 전통 종교 의식들이 점차 축소되었다. 나가시비나는 신토(神道)나 불교의 영향 아래 형성된 정화 의식이었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간주되면서 국가적으로 장려되지 않았다.
  2. 산업화와 환경 문제
    20세기 이후 일본이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강과 해안 지역의 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 인형을 강에 흘려보내는 행위가 환경 오염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늘어나면서, 20세기 중반부터는 많은 지역에서 나가시비나 의식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가시비나 풍습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집 안에서 히나 인형을 장식하는 히나마쓰리가 주요 전통 행사로 자리 잡았다.
  3. 현대 사회에서의 실용적 변화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바쁜 일상 속에서 전통적인 축제나 의식을 간소화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나가시비나 같은 전통 의식은 번거로운 절차와 비용이 들어가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히나마쓰리는 여전히 중요한 명절이지만, 원래의 나가시비나 의식을 행하는 지역은 극히 드물다.

 

4. 현대에서 나가시비나를 되살리려는 노력

비록 나가시비나가 과거처럼 널리 행해지지는 않지만, 현대에 들어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 문화 복원 운동의 일환으로 나가시비나를 다시 개최하는 움직임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교토(京都)의 '시모가모 신사(下鴨神社)'에서 열리는 나가시비나 재현 행사가 있다. 이 행사에서는 헤이안 시대의 전통을 재현하여 귀족 복장을 한 사람들이 강에 인형을 띄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방문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일본의 일부 해안 지역에서도 관광 활성화를 목적으로 전통 나가시비나 행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진행하고 있다. 인형을 직접 강에 띄우는 대신, 종이 인형을 사용해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나가시비나는 일본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원형은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금 전통 문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흐름 속에서, 나가시비나는 현대적 방식으로 복원되고 있으며, 일본 문화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